
몇 년 전 가을, 저는 경기도 파주 임진각을 찾았습니다. 그날은 하늘이 높고 푸르렀으며, 들판에는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그냥 가볍게 둘러보는 나들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그곳에 깃든 역사와 이야기들이 마음속 깊이 울림을 주었습니다.
임진각은 비무장지대와 인접해 있어 남북 분단의 현실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녹슨 채 멈춰 서 있는 거대한 증기기관차였습니다. 처음 사진으로 봤을 때는 ‘오래된 기차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직접 마주하니 그 기차가 지닌 무게감이 확연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전쟁의 상흔, 폭격당한 증기기관차
이 기관차는 한국전쟁 당시 경의선을 달리던 증기기관차로, 전쟁 중 수많은 포탄과 총탄을 맞고 결국 멈춰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관차 표면에는 크고 작은 탄흔이 수백 개 남아 있었고, 일부는 금속이 찢겨나간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전쟁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응축된 한 덩어리의 증거물 같았습니다.
이 기관차는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상처와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상징입니다. 철로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은 마치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는’ 현실을 말해 주는 듯했고, 그 곁에 서 있던 저는 오래도록 그 앞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가을의 선물, 임진각 코스모스
그날 임진각 주변에는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가 만개해 있었습니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꽃들은 마치 분단의 상징인 이 땅에도 여전히 평화와 아름다움이 공존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습니다. 사진 속에 담긴 연분홍빛과 하얀 꽃물결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전쟁의 흔적과 평화로운 풍경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그 장면은, 아이러니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마장호 출렁다리로 이어진 여정

임진각을 둘러본 후, 저는 마장 출렁다리로 향했습니다. 임진각에서 차로 20~30분 정도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는 이곳은 최근 파주의 명소로 자리 잡은 곳입니다. 마장호 출렁다리는 이름 그대로 호수 위를 가로지르는 긴 흔들 다리로,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호수 위의 산 그림자가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다리 위에 서면 살짝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발밑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등골을 간질입니다. 처음에는 약간 긴장했지만, 곧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가을빛으로 물든 산과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다리 중간에서 바라본 호수의 물빛과 가을로 변해가는 산들의 풍경은 사진으로 다 담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여행에서 느낀 것들
이번 여행은 단순히 ‘명소 방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임진각의 증기기관차 앞에서 저는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코스모스와 마장호 출렁다리에서는 자연이 주는 위로와 여유를 느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 하늘과 가을로 향해가는 들판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화와 자연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땅에도 꽃은 피고, 사람들은 웃으며 다리를 건넙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사진을 다시 보니 그때의 공기, 그때의 바람, 그리고 마음속 울림이 다시 살아납니다. 다음번에도 가을이 오면, 다시 그 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